한 가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5,6살쯤 된 아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정확히 무슨 잘못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분명 아이가 고쳐야 할 잘못이었다. 그 나이쯤 되면 고집을 부리고 떼를 부릴 시기이다.
아빠는 아이를 불러다가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고 그렇게 행동해선 안 된다고 좋은 말로 타일렀다. 하지만 아이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빠는 아이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만약 같은 잘못을 반복하면, 아이가 매 100대 맞기로 약속했다. 아빠와 아이는 재미있게 손을 맞잡고 엄지로 도장도 찍었다.
아이는 같은 잘못을 했을까?
물론 했다. 철 없는 아이니까.
아빠는 어떻게 했을까?
아빠는 아이를 불러다가 약속대로 100대 때렸다. 아이를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아이는 죽을테니까. 아빠는 아들을 봐주면서 100대를 때렸다.
아이는 어떻게 됐을까?
매가 아프든 아프지 않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됐다는 점이다. “아빠가 나를 100대나 때렸어...”
약속을 어긴 것은 아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마음에는 보이지 않는 큰 상처가 생겼고, 아빠를 향해서 분노했다. 그 사건 이후 아들은 아빠에게 마음 문을 쿵 닫았다. 그렇게 아이는 아빠를 미워하고 멀리했다.
아빠는 아이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아이는 더 비뚤어지고 말았다.
아빠가 아이를 때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아이는 더 버릇이 없어지고, 이후로는 훈육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빠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매는 아이를 바로잡는 것이 목적이다. 따끔하게 서너 대를 때리고나서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나머지 96대는 없는 것으로 한다. 아빠와 약속을 어겼지만 너를 용서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
더 바람직한 훈육은 지나친 징계를 약속하지 않는 것이다. 5,6세 아이의 잘못에 매 100대는 가혹하다. 특정한 잘못에 대해 매를 들겠다고 아이에게 미리 말하는 것도 좋지 않다. 아이는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다. 부모는 훈계만 하고, 어길 경우 매 맞는지 여부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다.
율법주의 양육은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시한다. 아이의 내면보다는 행동을 통제한다. 겉으로 바른 것 같아도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일이다.
신앙을 지도할 때도 부모는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